가와구치 가즈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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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와구치 가즈히사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투수로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1987년, 1989년, 1991년 세 차례 센트럴 리그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으며, 1991년 일본 시리즈 감투상을 수상했다.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 종합 코치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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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구치 가즈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선수 정보 | |
이름 | 가와구치 가즈히사 |
원어 이름 | 川口 和久 (가와구치 가즈히사) |
로마자 표기 | Kawaguchi Kazuhisa |
출생일 | 1959년 7월 8일 |
출생지 | 일본 돗토리현 돗토리시 |
사망일 | 알려지지 않음 |
키 | 183cm |
몸무게 | 75kg |
포지션 | 투수 |
투구 | 좌투 |
타석 | 양타 |
선수 경력 | |
프로 입단 연도 | 1980년 |
드래프트 순위 | 1순위 |
첫 출장 | 1981년 4월 10일 |
마지막 경기 | 1998년 10월 3일 |
선수 | 듀플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1 ~ 1994)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5 ~ 1998) |
코치 경력 | |
코치 | 돗토리 기타로우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2011 ~ 2014) |
기록 | |
리그 | NPB |
연도 | 1998 |
승-패 기록 | 139승 135패 |
평균 자책점 | 3.38 |
탈삼진 | 2092 |
세이브 | 4 |
기타 정보 | |
올스타 선정 | 6회 (1983, 1986 - 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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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수 경력
1981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한 가와구치는 곧바로 1군에 등록되었으나, 첫 등판에서 2루타를 맞고 2군행을 자원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야마모토 고지에게 투구 버릇을 간파당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2군으로 내려가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113][101]
1982년 1군 복귀 후 7월 15일 다이요전에서 프로 첫 승,[113] 9월 2일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 4피안타 완봉승으로 첫 완투승[114]을 기록하는 등 4승 5패, 평균 자책점 1.94로 가능성을 보였다. 1983년 하세가와 료헤이 코치의 지도로 투구폼을 교정,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하며 6월에는 월간 MVP를 수상하고,[116] 올스타전에 첫 출전하는 등[117] 15승을 기록했다.
1984년 전반기 부진을 딛고 후반기에 회복,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에 기여했으며, 일본 시리즈 3차전에서 완투승을 거두었다.[120][121] 1985년 싱커를 습득하며 9승,[120] 1986년에는 한신 타이거스전 5승을 포함, 12승을 기록하며 3년 만에 올스타전에 출전했다.[126]
1987년 센트럴 리그 최다 탈삼진(184개)을 기록,[129] 1988년 9월 월간 MVP 수상,[131] 미·일 야구에 출전했다.[132] 1989년 2년 만에 최다 탈삼진(192개)을 기록했다.
1990년 11승 13패로 부진했지만,[133] 1991년 개인 최다인 230개의 탈삼진으로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획득,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일본 시리즈 감투상을 수상했다.[135]
1992년 6월까지 2승 8패로 부진,[138] 6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 달성에 실패했다. 1993년 왼팔꿈치 관절염,[142] 왼손 검지 혈행 장애[143] 등으로 부상에 시달렸다.
1994년 시즌 초반 부진을 딛고 7월 이후 7승 3패로 회복했다. 시즌 후 FA 자격을 얻어 장인의 간병과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권유 등의 이유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103][147][148]
1995년 요미우리 이적 후 4승에 그쳤으나, 1996년 미야타 유키노리 코치의 권유로 구원 투수로 전향하여 프로 16년 만에 첫 세이브를 기록하는 등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일본 시리즈에도 출전했다. 1997년 부상으로 2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1998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2. 1. 프로 입단 전
가와구치 가즈히사는 돗토리현 돗토리시의 요시오카 온천에서 료칸과 식당을 운영하는 가정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97] 형들의 영향으로 야구를 시작해 초등학교 4학년 때 소년 야구팀에 입단했다.[98] 처음에는 1루수였지만 6학년 때 투수로 전향했고, 중학교 시절에는 돗토리시 대회에서 우승을 이끌었다.[98]강속구 투수로 주목받아 돗토리현 내 여러 고교 야구부로부터 입단 권유를 받았지만 돗토리조호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99] 1학년 때 추계 돗토리현 대회에서 3위에 올라 메이지 진구 야구 대회에 진출했고, 1차전에서 사쿠신가쿠인 고등학교에게 패했다.[99] 2학년 때는 춘계 주고쿠 대회에서 소토쿠 고등학교를 상대로 8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지만 팀은 패했다. 하지만 이 경기를 통해 프로 구단 스카우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99]
3학년 때는 마쓰모토 쇼지, 다나베 시게후미와 함께 ‘고교 좌완 3인방’으로 불리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100] 일본 프로 야구 10개 구단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으며,[101] 롯데 오리온스의 가네다 마사이치 감독은 가와구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영입을 제의하기도 했다. 가네다는 자신의 등번호 34번을 주고 계약금 3000만엔을 제시하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가와구치는 롯데의 훈련 방식에 부담을 느껴 가네다에게 사회인 야구를 거쳐 롯데에 입단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고등학교 졸업 후 1978년, 가와구치는 듀플로에 입단했다.[102] 듀플로는 자체 연습장이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고,[102] 가와구치는 평일에는 영업 업무를, 야간에는 야구 연습을 병행했다.[104] 입사 1년째, 스미토모 금속에 보강 선수로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 출전했다.[105]
입사 2년째인 1979년, 마쓰시타 전기와의 경기에서 부진한 투구를 보이며 자신감을 잃기도 했다.[102] 그러나 이후 지역 대회 등에서 호투하며 히로시마 도요 카프 스카우트의 눈에 띄었고, 드래프트 번외 입단을 제의받았다.[106][107] 1980년 드래프트 회의에서 히로시마는 하라 다쓰노리를 놓친 후 가와구치를 1순위로 지명했고, 가와구치는 계약금 3300만엔, 연봉 360만엔(추정)에 계약하며 히로시마에 입단했다.[109]
2. 2. 프로 야구 선수 시절
1981년 프로 데뷔 후 곧바로 1군에 등록되었으나, 첫 등판에서 2루타를 맞고 2군행을 자원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야마모토 고지에게 투구 버릇을 간파당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2군으로 내려가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113][101]1982년 1군 복귀 후 프로 첫 승과 첫 완투승을 기록하며 4승 5패, 평균 자책점 1.94로 가능성을 보였다.[113][114] 1983년 하세가와 료헤이 코치의 지도로 투구폼을 교정,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하며 월간 MVP를 수상하고,[116] 올스타전에 첫 출전하는 등[117] 15승을 기록했다.
1984년 전반기 부진을 딛고 후반기에 회복,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에 기여했으며, 일본 시리즈 3차전에서 완투승을 거두었다.[120][121] 1985년 싱커를 습득하며 9승,[120] 1986년에는 12승을 기록, 3년 만에 올스타전에 출전했다.[126]
1987년 센트럴 리그 최다 탈삼진(184개)을 기록,[129] 1988년 9월 월간 MVP 수상,[131] 미·일 야구에 출전했다.[132] 1989년 2년 만에 최다 탈삼진(192개)을 기록했다.
1990년 11승 13패로 부진했지만,[133] 1991년 개인 최다인 230개의 탈삼진으로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획득,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일본 시리즈 감투상을 수상했다.[135]
1992년 6월까지 2승 8패로 부진,[138] 6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 달성에 실패했다. 1993년 왼팔꿈치 관절염,[142] 왼손 검지 혈행 장애[143] 등으로 부상에 시달렸다.
1994년 시즌 초반 부진을 딛고 7월 이후 7승 3패로 회복했다. 시즌 후 FA 자격을 얻어 장인의 간병과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권유 등의 이유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103][147][148]
요미우리 이적 후 1995년에는 4승에 그쳤으나, 1996년 구원 투수로 전향하여 프로 16년 만에 첫 세이브를 기록하는 등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일본 시리즈에도 출전했다. 1997년 부상으로 2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1998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2. 2. 1.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
1981년 프로 데뷔 후 곧바로 1군에 등록되었으나,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 좌타자 상대 약점을 드러내며 2군으로 내려갔다.[113] 1982년 1군에 복귀, 7월 15일 다이요전에서 프로 첫 승을 거두었고, 9월 2일 주니치전에서 4피안타 완봉승으로 첫 완투승을 기록하는 등 4승 5패, 평균 자책점 1.94를 기록했다.[113][114]1983년 하세가와 료헤이 임시 코치의 지도로 투구폼을 교정,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했다.[115] 6월에는 월간 MVP를 수상하고,[116] 올스타전에 첫 출전했다.[117] 9월 3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188구 완투승,[118] 9월 21일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전 완투승[119] 등 15승을 기록했다.
1984년 전반기 부진을 딛고 후반기에 회복,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120] 일본 시리즈 3차전에서 완투승을 거두었다.[121]
1985년 싱커를 습득하며 9승을 기록했다.[120] 1986년 한신 타이거스전 5승을 포함, 12승을 기록, 3년 만에 올스타전에 출전했다.[126]
1987년 센트럴 리그 최다 탈삼진(184개)을 기록했다.[129] 1988년 9월 월간 MVP를 수상,[131] 미·일 야구에 출전했다.[132] 1989년 2년 만에 최다 탈삼진(192개)을 기록했다.
1990년 11승 13패로 부진했다.[133] 1991년 개인 최다인 230개의 탈삼진을 기록,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획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135] 일본 시리즈 감투상을 수상했다.[135]
1992년 6월까지 2승 8패로 부진,[138] 6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 달성에 실패했다. 1993년 왼팔꿈치 관절염,[142] 왼손 검지 혈행 장애[143] 등으로 부상에 시달렸다. 1994년 FA 자격을 얻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2. 2. 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95년에는 4승 6패에 그쳤다. 1996년 미야타 유키노리 코치의 권유로 구원 투수로 전향하여 프로 16년 만에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 같은 해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고, 일본 시리즈에 출전했다. 1997년에는 부상으로 2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98년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3. 은퇴 후
1999년부터 TBS의 야구 해설가로 활동했다.[78] 1998년 NHK 교육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기도 했다.[78] 1999년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시구를 했다.[78]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 삿포로 앰비셔스에서 활동했다.[78]
2005년 독립 리그인 돗토리 키타로우스의 총감독을 역임했다.[78] 2009년과 2010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스프링 캠프에서 임시 투수 코치를 맡았다.[78]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 종합 코치를 역임했다.[78]
2015년부터 요미우리 편성부 소속, TBS 라디오 및 TV 해설자로 복귀했다.[78] 2021년 고향 돗토리현 돗토리시로 이주, '돗토리 웰커니스포츠 종합 대사'로 위촉되었다.[78]
4. 플레이 스타일
가와구치 가즈히사는 속구를 주무기로 사용했으며, 커브와 슬라이더를 섞어 던지는 투구 스타일을 기본으로 삼았다.[86] 프로 입단 직후 아니야 소하치의 조언으로 우타자 인코스 크로스 파이어에 힘 있는 속구를 던져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74] 몸쪽 높은 곳(인하이)을 공략하여 파울을 유도하고, 느린 변화구로 삼진을 잡는 방식을 사용했다.[74] 좌타자의 경우 아웃코스 제구가 어려워 인코스 제구에 더 신경 썼다.[75] 제구와 구종 간파 방지를 위해 릴리스 포인트를 일정하게 유지했다.[87]
4. 1. 구종
가와구치 가즈히사는 속구, 커브, 슬라이더, 스크루볼을 구사했다.- 속구: 시속 140km/h대의 속구는 구속이나 코스보다 공을 힘껏 쥐고 스핀을 살려 손끝을 뻗어 던지는 것에 신경 썼다.[157] 속구에 능해 노리기만 하면 삼진을 잡아내는 힘이 있어[170] 1987년, 1989년, 1991년 센트럴 리그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다.
- 커브: 손바닥과 공을 띄우는 그립으로, 릴리스 때 중지로 공을 으깨는 감각으로 던져 스핀을 걸었다.[177] 소년 시절 니우라 히사오의 영향으로 커브를 먼저 익혔다.[171]
- 슬라이더: 커브와 같은 그립으로 손바닥을 공에 대고, 뗄 때 손목을 비스듬히 하는 것 외에는 속구와 같은 폼으로 던졌다.[177] 1991년 리그 최다 탈삼진(230개)을 기록하는데 기여했으나,[134] 이후 변화량이 줄었다.[167]
- 스크루볼: 포크볼을 베이스로, 릴리스 때 구부린 집게손가락에 공이 걸려 바깥으로 벗어나면서 떨어졌다.[177] 중지는 봉제선에 얹지 않았다.[177]
프로 입단 후에는 세로 변화구로 포크볼과 스크루볼을 익히는 등 연구를 거듭해 2~3년마다 새로운 구종을 습득했다.[171][173]
4. 2. 제구
가와구치 가즈히사는 속구를 주무기로 사용했으며, 같은 투구폼에서 커브와 슬라이더를 섞어 던지는 방식으로 경기를 운영했다.[86] 프로 입단 초기 아니야 소하치의 조언에 따라, 우타자 상대 시 인코스 크로스 파이어를 막기 위해 힘 있는 속구를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74] 몸쪽 가까이 붙어 배트 중심에 맞히기 어려운 공을 던지기 위해 노력했다.[74] 제구력과 구종 간파 방지를 위해 릴리스 포인트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87] 컨트롤이 불안정할 때는 포수에게 크게 자세를 잡게 하고, 2스트라이크 이후에는 코스에 집중하여 승부하는 전략을 사용했다.[77]4. 3. 선발 투수로서
가와구치 가즈히사는 주로 속구를 던졌으며, 같은 폼으로 커브와 슬라이더를 섞어 던지는 투구 스타일을 구사했다.[86] 아니야 소하치의 조언에 따라 우타자 인코스 크로스 파이어에 힘 있는 속구를 던져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74] 몸쪽 높은 공(인하이)을 공략하고, 인하이에서 파울을 유도한 후 느린 변화구로 삼진을 잡는 방식을 사용했다.[74] 좌타자의 경우 아웃코스 제구가 어려워 인코스 제구에 더 신경 썼다.[75]제구와 구종 간파 방지를 위해 릴리스 포인트를 일정하게 유지했다.[87] 팔 휘두름이 속구, 커브, 슬라이더에서 변하지 않아 타자와 포수 모두에게 어려움을 줬다.[76] 이 때문에 다쓰카와 미쓰오와 같은 포수가 없으면 패스볼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76]
다쓰카와와 배터리를 이룰 때 처음에는 호흡이 맞지 않았지만, 가와구치 특유의 견제구 리듬을 존중하고 타자 약점보다 던지기 쉬움을 중시하면서 궁합이 좋아졌다.[77] 강타자에게 집중력 있는 투구를 보였고, 2스트라이크 이후 코스에 집중하여 승부했다.[76][77]
은퇴 후 인터뷰에서 돔 구장, 특히 후쿠오카 돔을 어려워했다고 밝혔다. 어두운 환경과 높은 마운드 때문에 거리감을 잡기 어려워 아웃코스 스트레이트 궤도가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4년 5월 18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2회 도중 3실점으로 조기 강판되었는데, 이날 마키하라 히로미가 일본 프로 야구 사상 15번째 완전 경기를 달성했다.[78]
삼진 아니면 볼넷의 투구가 특징이었다.[79]
5. 상세 정보
가와구치 가즈히사는 히로시마 시절 '요미우리 킬러'로 활약하여 요미우리전 통산 33승 31패를 기록했다. 요미우리전에서 30승 이상을 거둔 투수 중 승수가 패배보다 많은 선수는 호시노 센이치, 히라마쓰 마사지, 가와구치뿐이다.[185] 동시에 '한신 킬러'로도 알려져 히로시마 시절 통산 34승(21패), 요미우리 이적 후 2승을 추가하여 통산 36승 21패를 기록했다.
가와구치의 주된 구종은 속구였으며, 같은 폼으로 던지는 커브와 슬라이더를 섞어 던지는 투구 스타일이 기본이었다.[86] 아니야 소하치의 조언을 받아, 우타자는 인코스 크로스 파이어, 좌타자는 인코스 제구에 신경 썼다.[74] [75] 인하이(in-high)에서 파울을 유도하고, 아웃로(out-low)의 느린 변화구로 삼진을 잡는 전략을 사용했다.[74]
제구와 구종 간파 방지를 위해 릴리스 포인트를 일정하게 유지했다.[87] 팔 휘두름이 속구, 커브, 슬라이더에서 변하지 않아 타자와 포수 모두에게 어려움을 줬다.[76] 다쓰카와 미쓰오와 배터리를 이룰 때는 투구 리듬과 던지기 쉬움을 중시하며 호흡을 맞췄다.[77] 기복이 심해 약한 타자에게 볼넷을 내주기도 했지만, 강타자에게는 집중력 있는 투구를 보였다.[76]
현역 은퇴 후 인터뷰에서 돔 구장, 특히 후쿠오카 돔을 어려워했다고 밝혔다. 아웃코스 스트레이트를 활용하는 스타일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4년 5월 18일 후쿠오카 돔 요미우리전에서 조기 강판되었는데, 이날 마키하라 히로미가 완전 경기를 달성했다.[78]
삼진 아니면 볼넷의 투구가 특징이었다.[79]
5. 1. 출신 학교
돗토리조호쿠 고등학교5. 2. 선수 경력
프로 1년차에 시범 경기부터 안정된 투구를 보여 감독 고바 다케시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10]。 곧 1군에 등록되어 자신감을 가졌지만, 첫 등판이 된 4월 10일 주니치전에서 좌타자를 상대로 등판하여 2루타를 맞고 2군에서 조정하고 싶다고 자원했다[20]。 하지만 이는 거절당했고, 6월경에는 야마모토 고지에게 투구 폼의 버릇 때문에 모든 구종을 순식간에 간파당하여 공포감을 느꼈다고 한다[20]。 같은 달 대 한신전에서 투수 야마모토 가즈유키에게 만루 홈런을 맞고 2군으로 강등되었고, 오시타 쓰요시나 오이시 기요시에 의해 철저하게 달리기를 했다[7]。 나고야 구장에서의 주니어 올스타 게임에는 올 웨스턴의 일원으로서 출전했다.혹독한 훈련을 극복하면서 자신감을 얻었고[7], 1982년 7월 8일에 1군에 승격하여, 10일의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전 등판 중에 허리 통증을 호소한 후쿠시 다카아키를 대신하여 15일 대 다이요전의 선발 투수로 출전, 이 경기에서 프로 첫 승을 거두었다[20]。 9월 2일의 대 주니치전에서는 4안타 완봉으로 첫 완투 승리를 달성하는 등[21], 같은 해에는 15경기에 등판하여 4승을 거두었고, 평균 자책점은 1.94였다. 같은 해 오프에는 전년에 이어 미국의 교육 리그에 참가했다[30]。
1983년 봄, 임시 코치로 초빙된 하세가와 료헤이로부터 컨트롤을 의식한 노 와인드업 투구 폼이 아닌, 입단 당시의 와인드업 투구 폼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 전환점이 되어, 선발 로테이션 투수로서 1군에 정착했다. 이때 하세가와는 "노 와인드업이면 상체에 너무 의존하여 어깨와 팔꿈치를 다치게 된다. 제구력 난조는 신경 쓰지 말고, 볼넷은 아군으로 만들면 된다"라고 조언했다고 한다[22]。 6월에는 첫 월간 MVP를 수상했다[23]。 올스타전에 첫 출전하여, 등판한 2차전에서는 몬다 히로미츠로부터 삼진을 잡았지만 오치아이 히로미츠에게 홈런을 맞았다[24]。 페넌트 레이스 종반까지 요미우리를 추격하는 팀에서 9월 3일의 직접 대결에서는 188구를 던져 완투 승리를 거두었고[25], 3일 간격으로 등판한 9월 21일의 대 다이요전에서도 완투 승리를 거두었다[26]。 같은 해에는 리그 최다인 32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처음으로 규정 이닝 (리그 3위, 평균 자책점 2.92)을 달성하고, 15승 10패를 기록했다.
1984년에는 지금까지의 강속구와 커브만으로는 통용되지 않게 되어, 전반기에는 1승밖에 거두지 못했다[27]。 그 때문에, 에가와 스구루의 조언도 있어 아웃 코스의 강속구 컨트롤을 연마할 필요성을 느껴, 6월부터 1개월 반 동안 2군에서 조정을 계속했다[27]。 후반기에는 7승을 거두는 등 부활했고, 팀은 센트럴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3차전에 등판하여, 1회를 삼자 범퇴로 막아내고 페이스를 잡아, 시리즈 첫 등판에서 완투 승리를 거두었다[28]。 하지만 6차전에서는 후쿠하라 미네오에게 만루 홈런을 맞는 등, 3회 도중 7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었다[29]。 팀이 일본 챔피언이 되었기 때문에, 전년도의 월드 챔피언으로서 방일한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미·일 야구에서 대결하여, 1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칼 립켄 주니어나 에디 머레이 등을 6안타 10탈삼진으로 막아내고 완봉 승리를 거두었다[30]。 최종전에서도 다시 선발 등판했지만, 패전 투수가 되었다[31]。 또한, 같은 해에 결혼했다[9]。
1985년에는, 우타자의 아웃 코스를 더욱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스크루를 익혔고[27], 2년 만에 규정 이닝을 달성하여 9승을 거두었다. 1986년에는 전년도 우승 팀인 한신을 상대로 5승[32]을 포함하여, 3년 만에 두 자릿수 승리인 12승을 기록했다. 올스타전에도 3년 만에 출전하여,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개최된 3차전에 선발 등판했다[33]。 허리 통증 때문에 일본 시리즈에는 출전하지 못했다[34]。
1987년에는 6월 6일까지 무패로 7연승을 거두는 등[36], 좋은 출발을 보였고, 시즌에서는 첫 리그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다. 1988년에는 올스타전 3차전에서 두 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3이닝 1안타 무실점, 3탈삼진을 기록했다[37]。 9월에 등판한 4경기 모두 완투 승리를 거두었고, 특히 9월 15일의 대 요미우리전에서는 1안타 완봉의 호투를 보이며, 두 번째 월간 MVP를 수상했다[38]。 미·일 야구에서는 3차전에 선발 등판했지만, 2회 4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었다[39]。 같은 해에는 13승 10패, 평균 자책점 2.55 (리그 4위)를 기록했다. 1989년에도 4월에 월간 MVP에 선정되어, 오프를 포함하여 2개월 연속 수상했다. 같은 해에도 12승 7패로 분전했고, 2년 만에 리그 최다 탈삼진을 기록했다. 하지만, 다음 해인 1990년에는 근속 피로와 같은 상태로 몸이 무거워져 본래의 투구를 하지 못해 고전하여, 11승 13패로 패전 투수가 되었다[40]。
강속구와 커브의 비율에서 커브를 놓치는 경우가 많아져, 슬라이더를 익혀[41], 1991년에는 시즌 통산 230탈삼진을 기록하여, 같은 해 타이틀로 제정된 최다 탈삼진을 획득하는 등,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전날 사사오카 신지가 녹아웃되어 터닝 포인트가 된 2차전에 선발 등판하여[42],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에게 2점 홈런을 맞았지만 8회까지 피안타 3개, 2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었다. 감독 야마모토 고지는 시리즈의 흐름을 가져오기 위해, 시즌 중에는 한 번도 없었던 3일 간격으로 가와구치를 5차전 선발로 기용했다[42]。 가와구치도 이를 기쁘게 받아들여 104구를 던져 8이닝 무실점의 호투를 보였고, 시리즈 MVP의 유력 후보로도 불렸다[42]。 특히, 8회 2사 만루 상황에서 아키야마 고지로부터 삼진을 잡은 강속구는 니노미야 기요스미 등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다[43]。 하지만, 구원 등판한 6차전에서는 동점인 6회 2사 만루에서 스즈키 야스토에게 2점 적시타, 7차전에서는 5회 1사 3루에서 히라노 겐과 다나베 노리오에게 결승 적시타를 맞았다[42]。 선발에서의 호투가 평가되어, 시리즈 감투상을 수상했다.
1992년에는 자신의 현역 생활 유일의 개막 투수, 개막전 패배를 포함하여 6월까지 2승 8패로 성적이 부진했고[45], 강속구를 맞는 경우가 많아[46] 시즌에서도 6년 연속으로 달성했던 두 자릿수 승리가 끊어졌다. 또한, 같은 해에는 미·일 야구에 출전하여 3차전에서 데이브 홀린스와 셰인 맥에게 홈런을 맞고 패전 투수가 되었다[48]。 1993년에는 6월에 급성 좌측 팔꿈치 관절염으로 1군 등록이 말소되었고[49], 시즌 막바지에는 왼손 검지 손가락에 혈행 장애가 발생했다[50]。 같은 해에 FA권을 획득했지만, 이를 행사하지 않았다.
1994년에는 개막부터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7연패를 하여 한때 선발 로테이션에서 제외되는 등[52], 성적이 부진했지만, 7월 이후에는 7승 3패로 컨디션을 되찾았다[53]。 한편, 전년에 난치성 췌장암으로 쓰러진 히노시에 사는 아내의 아버지가 9월에 악화되어, 도쿄로 이주하여 간호하고 싶다는 아내의 강한 호소가 있었다[9][54]。 가와구치 자신은 제2의 고향이 된 히로시마에 애착을 갖고 있었고, 스승과 같은 존재인 오노 유타카를 비롯한 동료들과 헤어지는 것에 저항감이 있었다고 한다[9]。 하지만 매일 밤처럼 이야기를 나누었고, 원정 생활이 계속되어 더욱 떨어져 생활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점도 있어, 고민 끝에 절차의 기한인 11월 8일 밤에 구단에 FA권 행사를 연락했다[9]。 이는 히로시마 구단 사상 최초의 FA권 행사였지만, 11월 10일에 가와구치와 회담한 히로시마 구단 상무는 "기분 좋게 보내주고 싶다"라고 말하며, 위로하지 않았다[55]。 또한, 이 시점에서는 이미 요미우리와 한신이 획득 의사를 히로시마 측에 전달하고 있었다[55]。
가와구치 가즈히사의 플레이 스타일 등이 알려지지 않은 퍼·리그에서 뛰는 것의 장점도 고려하여, 재경 구단이며 아내의 친가가 있는 히노시에서 본거지인 도코로자와시가 비교적 가까웠다는 점, 게다가 앞서 언급한 사회인 시절에 귀여움을 받았던 모리 시게카즈가 투수 코치로 재직하고 있었던 인연도 있어, 가와구치는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할 의사를 거의 굳히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후, 가와구치의 어린 시절부터 동경하던 인물인 요미우리 자이언츠(巨人)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으로부터 직접 제안을 받은 것과, 장인이 열렬한 자이언츠 팬이었던 점 때문에, 자이언츠에 입단했다.[56]。 자이언츠 측에게는 미야모토 가즈토모 밖에 없었던 좌완 선발 투수를 보강할 수 있다는 점[57]과, 전년에 자이언츠에게 4승을 거두었던 약점 투수와의 대결이 없어지는 점[56] 등을 높이 평가받았다. 아내의 아버지는 이적을 기뻐한 후, 1995년 3월에 세상을 떠났다[54]。
그러나 좌완 선발의 기둥으로 기대받은 1995년은 4승에 그쳤다. 특히 5월 10일 히로시마전(도쿄 돔)에서는 5회 초 0사 1루에서 쇼다 고조의 1루 라인으로의 번트 처리를 잠시 망설인 후에 라인 위에서 허둥지둥 주워 페어로 만드는 판단 미스를 범했다. 게다가 1군 투수 코치인 호리우치 쓰네오로부터 전력 외로 간주될 수 있는 언행도 듣고 다음 해에는 2군으로 시작했다[60]。 1996년에도 오픈전에서 결과를 내고 개막 3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9회 도중 1실점으로 호투했지만, 그 후 부진한 투구로 전혀 승리하지 못하고 5월에 선발 로테이션에서 제외되어, 6월 상순까지 2군에서 조정을 했다[61]。 이 사이에 은퇴도 생각했지만, 2군 투수 코치인 미야타 세이텐의 권유로 릴리프로 전향했다[56]。 미야타가 말을 걸기 전에는 연습도 오전에 마치고 있었지만, 마음을 다잡고 폼 개조에 착수하여 컨트롤이 개선되었고, 또한 고령으로 구속이 현저히 떨어진 점도 있어 전년 오프부터 근력 부분 강화 훈련을 계속한 결과 구속이 130km 중반에서 10km 이상이나 올랐다[62]。 2군에서의 호투가 인정되어 1군에 승격, 선발은 8월 10일 주니치전이 마지막이 되었지만[63], 7월부터 8월에 걸쳐 패배 경기에서 구원 등판하여 안정된 투구를 보여,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의 기용이 늘어났다[64]。 릴리프에서는 평균자책점 1점대 초반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그 무렵에 마무리 투수 마리오 브리토가 공략되기 시작한 점도 있어, 배터리 코치인 야마쿠라 가즈히로로부터 마무리로 던져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투수 코치인 호리우치 쓰네오로부터 맹반대를 받았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던 점도 있어 마무리로 등판, 9월 24일에는 프로 16년 만에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64]。 메이크 드라마를 향해 컨디션을 끌어올린 팀에서 같은 좌완 투수인 고노 히로후미와 함께 릴리프의 축이 되었다[63]。 10월 6일 주니치전(나고야 구장)에서는 9회 말 2사에서 다쓰나미 가즈요시로부터 삼진을 잡아내며, 본인 생애 첫 우승 투수가 되었다[64]。 공교롭게도 이 경기는, 나고야 구장에서의 1군 공식전 마지막 경기였다.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1996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제1전, 제2전, 제5전 3경기에 등판하여, 총 4이닝 2/3을 무실점으로 마쳤다[65]。
1997년부터는 고질병인 허리나 왼쪽 다리의 통증 어깨의 이물감 등으로 2군에서의 조정이 늘어 조성민이나 오노 히토시 등 젊은 선수들에게 투구나 마음가짐에 대한 조언을 보냈다[54]。 1998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 은퇴 경기가 된 10월 3일의 상대는 친정팀인 히로시마였고, 인사를 할 때 세레모니에 참가한 히로시마 선수들에게 예를 표했다.
히로시마 시절에는 ‘요미우리 킬러’로서도 활약하여 요미우리와의 상대 전적에서는 33승 31패를 기록했다. 요미우리전에서 30승 이상을 기록하고 있는 투수 가운데 패한 횟수보다 이긴 횟수를 많이 기록하고 있는 선수는 호시노 센이치, 히라마쓰 마사지, 가와구치 등 3명 뿐이다.[185] 동시에 ‘한신 킬러’이며, 1983년에는 한신전에서 3경기 연속 완봉승을 기록, 1987년 5승 무패, 1988년 5승 1패의 좋은 성적을 남기는 등 히로시마 시절에만 요미우리전을 뛰어 넘는 통산 34승(21패)을 기록했다. 또 요미우리 이적 후에 한신으로부터 2승을 올리고 있어 한신전에서의 생애 성적은 36승 21패가 됐다.
선수경력
- 돗토리조호쿠 고등학교
- 듀플로
- 히로시마 도요 카프(1981년 ~ 1994년)
- 요미우리 자이언츠(1995년 ~ 1998년)
통산 성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소속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4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투구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4구 | 사구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81 | 히로시마 | 7 | 0 | 0 | 0 | 0 | 0 | 0 | 0 | -- | .000 | 44 | 11.0 | 8 | 3 | 5 | 0 | 0 | 12 | 0 | 0 | 7 | 7 | 5.73 | 1.18 |
1982 | 15 | 11 | 1 | 1 | 0 | 4 | 5 | 0 | -- | .444 | 301 | 69.2 | 57 | 1 | 34 | 0 | 1 | 50 | 3 | 0 | 23 | 15 | 1.94 | 1.31 | |
1983 | 33 | 32 | 14 | 4 | 0 | 15 | 10 | 0 | -- | .600 | 920 | 218.2 | 189 | 23 | 104 | 1 | 8 | 166 | 2 | 1 | 87 | 71 | 2.92 | 1.34 | |
1984 | 24 | 22 | 5 | 1 | 0 | 8 | 6 | 0 | -- | .571 | 522 | 123.1 | 110 | 16 | 59 | 0 | 3 | 104 | 5 | 0 | 64 | 58 | 4.23 | 1.37 | |
1985 | 31 | 21 | 5 | 2 | 0 | 9 | 9 | 0 | -- | .500 | 627 | 143.2 | 150 | 15 | 62 | 3 | 2 | 116 | 4 | 0 | 73 | 70 | 4.39 | 1.48 | |
1986 | 24 | 24 | 6 | 1 | 0 | 12 | 9 | 0 | -- | .571 | 711 | 164.2 | 153 | 17 | 63 | 7 | 2 | 145 | 6 | 0 | 61 | 55 | 3.01 | 1.31 | |
1987 | 27 | 27 | 8 | 2 | 0 | 12 | 11 | 0 | -- | .522 | 756 | 183.1 | 154 | 21 | 62 | 8 | 2 | 184 | 1 | 0 | 67 | 60 | 2.95 | 1.18 | |
1988 | 27 | 25 | 8 | 2 | 1 | 13 | 10 | 0 | -- | .565 | 794 | 190.2 | 155 | 15 | 72 | 4 | 7 | 179 | 11 | 0 | 61 | 54 | 2.55 | 1.19 | |
1989 | 26 | 26 | 11 | 2 | 1 | 12 | 7 | 0 | -- | .632 | 851 | 208.1 | 167 | 18 | 73 | 8 | 6 | 192 | 8 | 0 | 65 | 58 | 2.51 | 1.15 | |
1990 | 29 | 29 | 11 | 2 | 0 | 11 | 13 | 0 | -- | .458 | 895 | 208.2 | 187 | 26 | 87 | 3 | 5 | 180 | 6 | 0 | 101 | 92 | 3.97 | 1.31 | |
1991 | 29 | 29 | 8 | 2 | 0 | 12 | 8 | 0 | -- | .600 | 840 | 205.0 | 169 | 16 | 82 | 4 | 3 | 230 | 10 | 0 | 70 | 66 | 2.90 | 1.22 | |
1992 | 26 | 26 | 9 | 2 | 1 | 8 | 12 | 0 | -- | .400 | 766 | 183.0 | 168 | 18 | 65 | 0 | 2 | 156 | 5 | 0 | 79 | 68 | 3.34 | 1.27 | |
1993 | 25 | 25 | 7 | 3 | 0 | 8 | 11 | 0 | -- | .421 | 722 | 162.2 | 167 | 15 | 74 | 2 | 3 | 128 | 5 | 0 | 71 | 64 | 3.54 | 1.48 | |
1994 | 27 | 22 | 3 | 1 | 0 | 7 | 10 | 0 | -- | .412 | 631 | 139.1 | 142 | 18 | 93 | 1 | 1 | 96 | 5 | 0 | 74 | 73 | 4.72 | 1.69 | |
1995 | 요미우리 | 17 | 17 | 2 | 0 | 0 | 4 | 6 | 0 | -- | .400 | 396 | 91.2 | 90 | 12 | 37 | 1 | 3 | 66 | 2 | 0 | 47 | 45 | 4.42 | 1.39 |
1996 | 29 | 11 | 0 | 0 | 0 | 1 | 4 | 3 | -- | .200 | 331 | 76.1 | 68 | 8 | 33 | 5 | 6 | 62 | 4 | 0 | 28 | 25 | 2.95 | 1.32 | |
1997 | 22 | 0 | 0 | 0 | 0 | 3 | 3 | 1 | -- | .500 | 81 | 16.1 | 23 | 3 | 7 | 0 | 1 | 17 | 1 | 0 | 20 | 18 | 9.92 | 1.84 | |
1998 | 17 | 0 | 0 | 0 | 0 | 0 | 0 | 0 | -- | ---- | 62 | 13.2 | 15 | 1 | 9 | 1 | 0 | 9 | 1 | 1 | 8 | 7 | 4.61 | 1.76 | |
통산: 18년 | 435 | 347 | 98 | 25 | 3 | 139 | 135 | 4 | -- | .507 | 10250 | 2410.0 | 2172 | 246 | 1021 | 48 | 55 | 2092 | 79 | 2 | 1006 | 906 | 3.38 | 1.32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5. 3. 지도자 경력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 종합 코치(2011년 ~ 2014년)[71]를 역임했다. 2009년과 2010년에는 요미우리의 미야자키 스프링 캠프에서 임시 투수 코치를 맡았으며, 2011년 시즌부터 1군 투수 종합 코치로 취임했다.[71] 2014년 10월 19일에 퇴임하고 비상근 프런트(편성부)에 합류했다.[72]5. 4. 수상·타이틀 경력
가와구치 가즈히사는 선수 시절 최다 탈삼진 3회(1987년, 1989년, 1991년), 일본 시리즈 감투상 1회(1991년), 월간 MVP 3회(1983년 6월, 1988년 9월, 1989년 4월), 우수 JCB·MEP상 1회(1989년)를 수상했다.5. 4. 1. 타이틀
- 최다 탈삼진 : 3회(1987년, 1989년, 1991년) ※센트럴 리그에서는 1991년부터 타이틀로 제정됨.[185]
- 일본 시리즈 감투상 : 1회(1991년)
- 월간 MVP : 3회(1983년 6월, 1988년 9월, 1989년 4월)
- 우수 JCB·MEP상 : 1회(1989년)
5. 4. 2. 수상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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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 개인 기록
히로시마 시절 가와구치는 ‘요미우리 킬러’로 활약하여 요미우리 상대 통산 33승 31패를 기록했다. 요미우리전 30승 이상 투수 중 승리가 패배보다 많은 선수는 호시노 센이치, 히라마쓰 마사지, 가와구치뿐이다.[185] 또한 ‘한신 킬러’로도 알려져 1983년 한신전 3경기 연속 완봉승, 1987년 5승 무패, 1988년 5승 1패를 기록하는 등 히로시마 시절 요미우리전보다 많은 통산 34승(21패)을 거두었다. 요미우리 이적 후 한신전 2승을 추가하여 통산 36승 21패를 기록했다.
5. 5. 1. 첫 기록
- 첫 등판: 1981년 4월 10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1차전(나고야 구장), 6회말에 4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하여 마무리, 3이닝 3실점[20]
- 첫 탈삼진: 상동, 7회말에 히라노 겐으로부터
- 첫 선발·첫 승리: 1982년 7월 15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4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6이닝 1실점[20]
- 첫 완투 승리·첫 완봉 승리: 1982년 9월 2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24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21]
- 첫 세이브: 1996년 9월 24일, 대 히로시마 도요 카프 26차전(도쿄 돔), 7회초에 2번째 투수로서 구원 등판하여 마무리, 3이닝 무실점[155]
5. 5. 2. 기록 달성 경력
달성 내용 | 달성일 | 상대팀 | 구장 | 비고 |
---|---|---|---|---|
1000 투구 이닝 | 1988년 7월 7일 | 한신 타이거스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5회초 3사 때 달성 |
1000 탈삼진 | 1989년 6월 8일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2회초 스미 후지오로부터, 역대 79번째 |
1500 투구 이닝 | 1990년 9월 22일 | 요미우리 자이언츠 | 도쿄 돔 | 6회말 2사 때 달성 |
100승 | 1991년 6월 16일 | 요미우리 자이언츠 | 히로시마 시민 구장 | 완봉 승리, 역대 102번째 |
1500 탈삼진 | 1991년 9월 7일 | 요미우리 자이언츠 | 도쿄 돔 | 4회말 오카자키 가오루로부터, 역대 34번째 |
2000 투구 이닝 | 1993년 7월 15일 | 요미우리 자이언츠 | 삿포로 마루야마 구장 | 3회말 3사 때 달성, 역대 71번째 |
2000 탈삼진 | 1995년 9월 27일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 도쿄 돔 | 3회초 하루 도시오로부터, 역대 14번째 |
5. 5. 3. 기타
5. 6. 등번호
- '''34''' (1981년 ~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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投球術 勝ちをつかむ『1球の攻防』 川口和久×槙原寛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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